[첼로 도전기] 100일차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첼로를 시작한지 어느덧 100일이 지났다. 100일이 지난 지금, 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은 이것이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쳐맞기 전까지는 - 마이클 타이슨"

시작할 때는 분명 나도 꾸준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바흐를 연주할 수 있겠지, 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등록했었다.
근데 막상 100일 동안 배워본 결과, 진짜 첼로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나처럼 악기를 배워본 적도 없고 '음치+박치+단풍손' 3단 콤보의 신체조건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정말 다른 차원의 그 어떤 것이었다.

쳐 맞고 알게 된 사실

첼로를 직접 배우면서 쳐 맞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들을 적어보자면,

1. 첼로에는 음을 표시하기 위한 그 어떤 표식도 없다.
: 피아노는 건반끼리 다 분리되어 있어서 아무리 초보라도 특정 음을 내는게 전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첼로는 어디를 눌러야 어떤 음이 나오는지 아무런 표시가 없다.. 진짜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느낌이다. 혹은 처음 침을 놓는 한의사의 마음이 이런 걸까 싶다. 사람의 피부에도 침을 놓기 위한 그 어떤 표식도 없으니 말이다.

아무런 표시도 없는 첼로 지판

2. 자세에 대한 자유도가 굉장히 높다. 그래서 초보한테는 더 어렵다.
: 첼로는 피아노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다. 첼로를 품안에 안고 연주해야 하는데, 첼로의 엔드핀 높이와 의자에 걸터 앉은 내 엉덩이의 위치, 바닥에 놓인 T자의 위치에 따라서 매번 첼로의 내 품안에서의 위치가 조금씩 달라진다. 이게 왜 문제냐면, 1번에서처럼 첼로는 어느 부분을 눌러야 어떤 음이 나오는지 표시가 없는데, 첼로마저 매번 위치가 변경되면 더더욱 정확한 음을 내는 것이 어려워진다. 마치 움직이는 타겟이 고정된 타겟보다 총으로 맞추기가 훨씬 어려운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연주자들의 품에 안긴 첼로의 위치는 조금씩 다 다른데, 고수가 되면 이게 오히려 장점이 되거나 연주에 전혀 상관이 없어지는 것 같다..

3. 악기를 켜는데 몸이 너무 아프다. 
:  처음 몇주동안 첼로만 하면 온몸이 아팠다. 왼팔은 반으로 접은 채로 첼로 지판을 눌러야 하는데 이상하게 이두근이 너무 아팠다. 헬스를 해서 이두근이 조금 있는데 처음에 이것 때문인가 싶었다(진짜 이것 때문에 포기해야 하나 싶었음).
현악기는 강력한 철선을 손가락으로 눌러서 소리를 내야하니까 손가락이 아픈건 당연하게 느껴졌고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활을 들고 보잉(bowing)해야하는 오른손과 손목이 아픈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고통이었다. 더군다나 컴퓨터를 많이하는 직업군이다보니 손목이 안그래도 안좋았는데 그 고통이 더 심해진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허리와 엉덩이, 목도 아프다. 이 부분은 어떤 악기이든 오래 연주하면 아프게 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악기를 처음 배운 나로서는 역시나 예상하지 못한 고통이었다. 

결론적으로 첼로라는 악기는 진입장벽이 꽤나 높은 악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내가 음대 입시를 할 것도 아니고 첼로로 돈을 벌 것도 아니기에 적당히 재미 위주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게임이든 운동이든 그 어떤 취미일지라도 잘하지 못하면 재미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켜는 첼로 소리를 내가 듣기가 좋아야 재미가 있는데, 아직까지는 그런 감동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ㅠ(100번 하면 1번 정도는 괜찮게 들림..)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여일이 지난 지금, 내가 이 어려운 첼로를 도대체 왜 배우려고 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 첼로를 시작할즈음 읽었던 '이 나이에 첼로를 기어이 하겠다고'라는 책을 다시 펼쳐보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구절에 밑줄을 그어놓은 것이 보였다. 

p165
취미는 참 좋은 것.
영원을 약속했던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기도 하고, 직장에서는 잘리기도 하지만, 취미는 내가 먼저 질려서 버리지 않는 한 나를 버리지 않는다.
새로운 취미를 만든다는것은 세상을 향해 새로운 문을 하나 더 여는 것이기도 하고,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나만의 비밀의 방을 갖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나는 첼로를 시작하고 알게 됐다.

그랬다. 첼로를 시작하려고 생각한 무렵에 나는 조금 많이 외로웠던 것 같다. 그래서 첼로라는 친구를 사귀고 싶었던 것 같다. 또한 첼로를 시작하고 나에게 완전히 다른 세계의 문이 열린 것은 분명하다. 선생님도 그렇고 음악 학원이라는 공간은 '이과-공대-개발자'의 테크트리를 밟아온 나에게는 분명히 완벽하게 다른 세계이다. 일단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이상, 손이 박살나서 더이상 첼로를 할 수 없게 될때까지 해봐야겠다. 첼로야, 앞으로 더 친해지자